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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 짚기

도 존 2023. 5. 24. 23:34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 라는 말이 있다.
나는 ‘가라앉는 것에는 부레가 있다’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인간에게는 날개와 부레, 두 가지가 모두 없다.
그러므로 개인의 추락— 과업의 실패, 사랑으로부터의 소외, 관계의 단절로 대표되는— 은 당사자에게 혼란스럽고 당혹스러운 상태이다. 이런 추락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의 상호작용으로 일어나는 일이므로 다분히 외부적이다. 그러나 신경증적 우울감과 공황장애, 자기비하와 자책 등은 자신 스스로와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발생하므로 내부적이다. 이것은 날개와 부레가 실제로 동물 개체에서 위치하는 곳과 동일하다.

신경증적으로 우울한 상태에 있을 때, 어떤 인간은 오히려 그 감정을 더욱 강화하고 심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나의 개인적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이는 현재 자신이 처해 있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러한 상황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미루어 짐작해 징벌적인 의미로 자신에게 고통을 가중하거나, 또는 고통받는 나의 상황이 외부적으로 드러나,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이 필요한 상황임을 알리려 하는 것이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것이 정신적인 건강이 확립된 사람의 메커니즘과는 많이 벗어나 있다는 것을 곧바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얼핏 지속적인 관심을 통해 인지되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켜 이를 해소해야 할 듯 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그들을 더욱 관심에 의존하도록 하여 현 상황에 안주하고자 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함부로 그들에게 동정의 말을 건네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이 ‘이 문제는 내 스스로 해결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긴 고독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더 유효하고 지속 가능한 해결책일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정신의 과정을 ‘바닥 짚기’로 일컫는다.

내가 수영을 처음 배우기 위해 7살이 되어 지역 스포츠 센터에 방문했던 날, 나는 수업을 들으려면 어떤 레인으로 가야 하는지 주변의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내 기억 속의 그는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의 체구를 가진 남자아이였다. 그는 내가 오늘 처음으로 수영장에 왔는지를 물어본 뒤에, 나를 가장 수심이 깊은 레인으로 안내해 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영문을 모른 채 나는 3미터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시야가 흐릿했고, 숨을 쉬지 못한 채로 물 속에 빠져 아주 괴로웠다.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나고 있는 것처럼 주변이 느리게 움직였다. 사람이 적은 수영장 안에 둔탁한 파열음이 들렸을 것이다. 나는 원망의 말들을 소리쳤으나 염소로 소독된 물은 다만 내 기도 속으로 들이칠 뿐이었다. 흔들리는 수면 위로 그 남자애의 표정없는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눈물이 수경 안을 가득 채워 시야가 흐릿해질 때 나는 바닥에 내 몸이 닿는 것을 느꼈다. 즉시 나는 내가 가진 가장 강력한 힘으로 바닥을 차내고 호흡을 위한 강력하고 원초적인 욕구를 위해 수면으로 솟구쳤다.

그 다음의 과정은 흐릿한 기억으로 남았다. 먹었던 물을 마구 토해내고, 울면서 어떻게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전부이다. 다시는 수영장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악다구니를 썼던 기억도 난다.

그러나 그 다음 주에 나는 다시 수영장에 가기로 마음을 고쳐먹었고, 그로부터 5년 동안이나 더

그 날 내 힘으로 뭍으로 올라오지 않았더라면, 누군가 나를 건져올려 주었더라면 나는 아마 다시는 물 근처에도 가지 않았을 것이라 확신한다. 내 힘으로도 극복할 수 있었다는 무의식이, 바닥을 짚고 올라온 나의 몸이 더 이상 물이 나에게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버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울한 감정이 한동안 나를 지배하려 들 때, 나는 ‘여기서 더 나빠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정말로 바닥에 닿았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바닥을 짚고 다시 물 밖으로, 다시금 내 힘으로 올라오는 경험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수면으로 솟구치고 싶다고, 새로운 공기를 마시고 싶다고 느끼는 그 순간은 반드시 올 것이다. 영원히 침잠하는 것은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부레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닥을 짚는 일은 그래서 아주 소중한 경험으로, 남은 생의 어떤 순간에도 그것을 기억할 수 있다면 삶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당신의 어려움을 가까이에서 목격함에도 섣부른 위로를 건네지 않기로 결심한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당신이 가라앉는 중이라면 언제나 그 곳에도 바닥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고, 바닥을 짚었다면 언제나 다시 올라올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떤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결국 우리를 시도하게 만들 것이다.